문화도시 경기도 여주에서 가족들과 가볼만한 세종대왕역사문화관과 근처 여행코스도 함께 소개드려요!
문화도시 여주!
기상청의 대설 주의보나 강추위 예보는 엄포(?)에 지나지 않았고, 장갑을 끼지 않아도 손이 시리지 않는
차가움 속에 포근함이 담긴 능원이었다.
탁 트인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능 쪽을 향해 발길을 돌리면
‘세종대왕 역사문화관’이 조용히 먼저 맞이 해준다.
역사문화관은 ‘이것저것 모아놓은 역사관’이 아니다.
기억해야 할 것, 알아야 할 것 들을 중심으로 임팩트 있게 조성한 공간이다.
결론부터 예기하면 ‘역사관’을 만든 기획아이디어를 칭찬해줄 만 했다. 조선 왕조의 왕릉 집합소 같은 구리
혹은 중종 등이 묻혀있는 선정릉 등에 가보면, 죽어서도 무인석과 문인석을 호위병 삼아 죽어서도 천하를
호령하는 웅장함을 보일 뿐 그 왕에 대한 생생한 내용은 안내판으로만 알릴 뿐이다.
그러나 세종대왕릉은 왕릉을 친견하기에 앞서 새로이 단장한 ‘세종대왕 역사문화관’ 관람을 통해
세종의 업적과 위대함, 그리고 왕릉 조성 과정과 그 당시의 용어 등에 대한 일차적인 학습을 한 뒤
릉을 둘러본다는 점에서 참관의 의미가 더 깊어진다.
세종대왕역사문화관은 3개의 상설 전시실과 1개의 기획전시실, 영상실, 카페, 수장고 등을 갖추고 있다.
세종대왕이 1실이고, 효종대왕이 2실이다.(효종대왕은 다음 기회에 상술하도록 하겠다.) 역사문화관에
들어가면 간단히 코로나 체크를 한 뒤 처음 마주치는 곳이 ‘영상실’이다.
“왕의 죽음에서 왕릉건설까지‘라는 영상물은 잊혀져 가는 전통의 가치를 다시 되새기게 해준다.
전통을 지키고 유지하는 일은 일견 성가신 일이다. 편리함과 간편함이 지배하여 우리네들은 언제부터인가 절차를 축소하거나 무시하는 것을 당연시해 왔다.
절차를 중시하는 정신은 오늘날의 민주주의와도 일맥상통한다.
장례기간 및 왕릉 조성까지의 ’합‘ ’설빙‘ ’고사묘‘ ’간심(왕릉후보지 물색)‘ 같은 용어는 낯설지만
상식을 넓히는 차원에서라도 한번쯤 배워두는 것도 좋다.
운동 선수들이 본격 훈련 전에 몸을 풀듯 영상실에서 상기와 같은 내용을 학습한 뒤 마주하는
그림이 있다. 왕의 즉위도이다. 한 눈에 들어온다. 사극에서 간혹 보는 왕의 즉위 영상과는
다른 감흥을 준다.
이어 특징적으로 구획된 관람실을 들어가면 각 실마다 핵심내용을 한 문장으로 응축하여 관람자의
이해를 돕는다. 앙부일구, 측우기와 같은 과학기술 발전상을 설명한 곳을
’하늘을 열어 백성에게 전하다‘는 식이다.
각 실 안내판에는 세종의 애민 정신을 보여주는 글귀가 쓰여 있다.
”나라는 백성을 근본으로 삼고, 백성은 먹는 것을 하늘로 삼는다(세종실록, 1444년 윤 7월 25일).
오늘의 한국 상황에 대입해보아도 전혀 어색하지 않다.
자고로 지도자는 백성들의 삶을 고단하게 해서는 안된다. 세종의 가르침을 한시도 잊어서는 안될 것이다.
판저강 토벌과 4군 6진 개척은 영토수호와 국방력의 중요성을 후손들에게 가르쳐 준다.
’朝宗(조종)이 물려주신 땅 한 치도 내어줄 수 없다(세종실록, 1437년 9월 29일)“는 그 단호함이 있었기에 오늘의 대한민국이 살아 숨 쉬고 있다고 본다.
세종의 여진 정벌은 의의가 크다.
왜냐하면 선대인 태종은 재위 18년간 여진족과 왜구 등 외적과 싸워 9승 36패를 했기 때문이다.
당시 여진족은 부족끼리 심각하게 싸웠고, 통합된 국가체제를 이루지도 못한 상태였다.
그런데도 태종 군대는 1406년, 그리고 1410년 전반기 약 4개월 동안 여섯 차례 전투에서
여진족에게 대체로 패배했다. 두 차례 작은 승리가 있었을 뿐이었다.
그러나 세종은 달랐다. 국내 정치성공이 결코 대외안전을 보장해주지 못한다는 사실을 알았고,
냉정한 현실 직시만이 국방력의 원천임을 절감했다.
그래서 세종은 ‘은혜와 위력의 병용(恩威竝用, 은위병용)’으로 요약되는 대외정책을 펼친다.
여진족을 토벌하되 이민족을 포용했다.
세종 5년(1423년)을 전후해 ”조선에서 살고 싶다“며 일본과 여진, 그리고 중국과 남만지역 사람들이
떼를 지어 들어왔다. ‘작지만 강한 나라’를 만들겠다는 비전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전시실을 둘러보다 약간의 의외이자 작은 놀라움을 준 것은 ‘세종대왕 어보’다.
묘호를 세종으로 올리면서 만든 어보인데, 그 단촐함과 소박한 조형이 의외로 느껴졌다.
지나친 허례의식을 배격하려는 소박한 마음에서 우러나온 것이라고 추론해보았다.
이 어보는 12자의 한문을 새겨 세종의 명철함을 후세에 각인시킨다.
英文譽武(영문예무, 문덕이 빼어나고 무덕이 통달) 仁聖明孝(인성명효, 어질고 덕망있고 명철하고
효성스러움), 大王之室(대왕지실)이 그것이다.
4번째 방에 설치된 特種(특종)을 흥미롭게 감상한 뒤 세종대왕이 묻힌 영릉으로 발길을 옮긴다.
탁 터진 시야와 함께 곳곳에 심어놓은 소나무들이 엊그제 내린 눈을 지상으로 떨어뜨리며 환대해준다.
영릉으로 가는 길은 산책으로도 제격이다.
한번쯤 느리게 걷기를 통해 느리게 살기를 되새겨 볼 수 있는 길이다.
가는 길 주변에 조성해놓은 조형물 등도 가벼운 볼거리이다.
‘책방’은 책읽기를 점점더 소홀히 하는 현대인에게 작은 경고를 던진다.
”목숨 걸고 노력하면 안되는 일이 없고, 지금 하고 있는 일이 너의 인생“이라고 말씀하시는 것 같다.
그 책방은 누구든 자유롭게 들어가 책읽기를 할 수 있으나, 비치된 책이 많지 않은 것이 흠이다.
세종의 리더십 등에 관한 여러 현인들의 저서 등을 보다 많이 비치해 놓는 것도 한 방법일 것이다.
영릉의 공간구성은 여느 왕릉과 크게 다르지 않다. 풍수를 공부하는 사람들이 반드시 들를 정도로
명당 중의 명당이다. 석물 등의 배치 등에 관해서는 여러 사람이 포스팅 한 관계로 생략하고 필자는 두 가지에 주목했다.
금천교와 신도 및 어도이다. 홍살문을 지나면 작은 실개천이 있는데 금천교이다.
금천교는 이승과 저승을 가르는 다리인데, 사실 다리라고 부르기엔 안쓰러울 정도로 작다.
하지만 이 다리를 넘어가는 순간, 속세를 벗어나 영적 세계로 진입한 듯한 느낌을 준다.
그리고 나란히 왕릉 앞 정자각까지 나란히 놓여 진 신도와 어도를 따라 걸으면 대왕이 된 듯한
즐거운 착각도 안겨 준다.
신도는 돌아가신 혼령이 다니는 길이고,
어도는 제사 드리는 왕이 다니는 길이다.
상쾌한 공기를 벗 삼아 영릉 관람을 마치고 주차장으로 돌아오는 길에 관람객 대다수가 가족이었고,
중고등 학생들이 많이 눈에 띈 것이 대견스러워 보였다.
영릉 앞에서 수학 1차, 2차 방정식을 주제로 삼아 수학공부에 대해 재잘거리는 학생들의 목소리는
세종대왕의 웅지를 지켜나갈 미래의 동량들이었다.
역사공부와 배움이 있는 세종대왕릉과 역사문화관 탐방이었다.
그리고 관람을 마치고 출출한 배를 채워줄 맛집은 주차장에서 3분 정도 시청방면으로 가면
바지락 칼국수 집이 있다. 넒은 주차장에 주차에도 애로가 없고, 가격에 비해 맛도 그만이다.
추위를 녹이는데도 제격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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